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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음악이 되는 순간 - 에스토니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파보 예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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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태영 2026. 10. 2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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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0일(화) 오후 7시 30분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에르키스벤 튀르, 《액션–패션–일루전》 중 〈패션〉·〈일루전〉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시벨리우스, 교향곡 제5번 E♭장조 Op. 82바이올린 앙코르: 바흐, 〈사라방드〉, 관현악 앙코르: 후고 알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모음곡》 Op. 49 중 〈엘레지〉, 브람스, 《헝가리 무곡》 제1번 

올 3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현재 에스토니아 국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올라리 엘츠(Olari Elts, 1971~)가 한국을 찾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2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였으며, 바이올린 협연은 제13회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인 박수예가 맡았다. 여기에 에스토니아 출신 작곡가 에르키스벤 튀르(Erkki-Sven Tüür)의 약 4분 길이 관현악곡 《템페스트의 주문》까지 소개하며, 엘츠는 자신의 조국이 지닌 음악적 자산을 한국 청중에게 알렸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가 한국을 찾았다.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집안 출신인 파보 예르비(Paavo Järvi)가 에스토니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stonian Festival Orchestra)를 이끌고 내한한 것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5번과 튀르의 《액션–패션–일루전》(Action–Passion–Illusion) 가운데 제2곡 〈패션〉과 제3곡 〈일루전〉을 들려주었다. 올 3월의 공연이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와 한국 오케스트라의 만남을 통해 북유럽 레퍼토리를 조명했다면, 이번에는 에스토니아 오케스트라가 직접 내한해 자국의 음악적 정체성과 북유럽 음악의 매력을 한층 입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협주곡의 작곡가만 시벨리우스에서 브람스로 바뀌었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의 음악, 그중에서도 협주곡은 가을이라는 계절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북유럽의 서늘한 풍경을 환기하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과 브람스 특유의 깊고 내밀한 서정성이 한 무대에서 어떤 대비와 조화를 이루었을지, 이번 공연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감상 지점이었다.

 

① 국제적 오케스트라, 에스토니아의 음악적 뿌리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음악 축제인 패르누 뮤직 페스티벌(Pärnu Music Festival)의 상주 악단이기도 한 에스토니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정상급 연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결성되는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이다. 우리나라의 고잉홈 프로젝트나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평창대관령국제음악제의 프로젝트 악단을 떠올리면 그 성격을 이해하기 쉽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국적과 소속을 넘어 하나의 음악적 목표 아래 모이는 만큼, 악단 안에서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출신 연주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다국적 오케스트라라는 오늘날의 국제적 흐름이 이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주자 선발과 오케스트라 구성에서 출신 국가와 배경의 경계가 점차 느슨해지고, 비유럽권 음악인들의 국제무대 진출도 활발해지면서 오늘날의 오케스트라는 특정 국가의 음악가들만으로 구성되는 전통적 형태를 넘어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연주자들이 함께 만드는 집단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토니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세계 각지의 뛰어난 연주자들이 결집한 일종의 ‘어벤져스’형 악단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악단의 정체성을 단순히 연주자들의 국제적 면면이나 화려한 구성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다국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발트 3국과 북유럽의 음악적 정서가 뚜렷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르비 가문이 추구해 온 음악적 이상과 예술적 지향이 에스토니아 출신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악단의 구성과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악단의 절반 이상을 에스토니아 출신 연주자들이 차지한다는 점은 이 오케스트라가 국제적 개방성을 추구하면서도 자국의 음악적 뿌리를 놓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연주자들의 기량과 경험이 에스토니아 고유의 음악적 토대 위에서 하나로 결집할 때, 이 악단만의 색채가 형성되는 것이다.

 

② 자국의 음악을 세계에 내놓는다는 것

 

튀르의 《액션–패션–일루전》은 지난 3월 올라리 엘츠가 소개한 《템페스트의 주문》과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의 음악을 한국에 알리려는 의도가 분명한 선택이었다. 자국의 작품을 해외 공연에서 소개하는 일은 작품의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아주 바람직하다. 문화는 그렇게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자국의 창작물을 새로운 청중에게 노출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 간다. 해외 순회공연에 나선 음악가가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국 작곡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문화적 자긍심의 표현인 동시에 문화 수출의 실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을 받아들이고 그 전통을 뒤따라온 한국 음악계의 태도는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 가서 베토벤과 브람스를 얼마나 잘 연주하는지 증명함으로써 인정받으려는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보편적 레퍼토리를 통해 연주력을 겨루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국의 창작곡과 음악적 정체성을 세계에 소개하려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리는 현실이다. 문화적 교류가 일방적인 수용에 머물지 않으려면, 우리 역시 세계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내보여야 한다. 가령 남미의 K-pop 댄스 그룹이 한국을 찾아 공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이 한국 관객에게 자신들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 주기 위해 현지에서 익숙한 K-pop 레퍼토리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이 갈고닦은 독자적인 프로덕션을 선보이려 할 가능성이 크다. 박진영과 양현석, 방시혁이 구축한 K-pop의 제작 시스템이나 BTS, 코르티스(CORTIS)와 같은 한국의 아티스트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실은 그들에게도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보여 주어야 할 것은 한국 음악의 모방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악적 개성과 역량일 것이다. 문화 교류란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각자의 고유한 언어를 드러내고 그 차이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튀르의 작품은 에스토니아 음악을 소개한다는 목적에는 충실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현악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되는 제2곡 〈패션〉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격정과는 달리 고요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형성했다.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연상시키는 현악 앙상블의 음향적 구성 위로,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음악에서 접할 수 있는 정적인 영성과 침묵을 향한 지향이 떠올랐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적 감각과 미니멀리즘적 반복, 선적인 다성음악의 어법이 교차하면서 종교적 명상에 가까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음향을 과도하게 증폭하거나 극적인 대비를 앞세우기보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을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는 순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곡은 북유럽 음악의 한 갈래와 맞닿아 있는 듯했다. 반면 제3곡 〈일루전〉은 제목이 암시하는 환영과 혼란을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구현했다. 짧은 음형의 반복과 돌연한 중단, 음향의 급격한 변화가 청자의 감각을 흔들며 음악적 긴장감을 만들었다. 이 곡에서는 튀르의 음악적 자산 가운데 하나인 록(Rock)의 거칠고 증폭된 사운드를 향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듯했다. 정적이고 명상적인 〈패션〉과 강렬하고 충동적인 〈일루전〉은 서로 다른 음향 세계를 제시했지만, 두 작품을 연이어 들으면서 그 차이가 작곡가만의 독자적인 음악 언어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통합되었는지는 의문이 남았다.

이러한 아쉬움은 지난 7월 9일, 네덜란드 출신 지휘자 안토니 헤르무스(Antony Hermus)가 KBS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자국 작곡가 요한 바헤나르(Johan Wagenaar)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서곡을 소개했던 공연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에도 작품을 듣는 동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어법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두드러져, 독자적인 개성과 작곡적 필연성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특정 작곡가의 어법과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음악사에서 양식의 계승과 변형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유사성은 그 자체로 표절이나 모방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익숙한 관현악적 효과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말하려는 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청자는 작품의 독자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 느낀 불편함은 에스토니아나 네덜란드의 음악을 소개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국의 작품을 세계 무대에 당당히 내놓는 태도는 한국 음악계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문제는 문화적 소개의 당위성과 작품 자체의 예술적 성취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자국의 음악을 알리는 일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작품이 청중에게 설득력을 얻으려면 음악적 완성도와 독창성 역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창작 음악을 돌아보게 된다. 국내 작곡가들이 이와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발표한다면, 과연 우리 오케스트라와 공연 기획자들은 이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선택할 것인가. 어쩌면 해외 작곡가의 작품은 국제적 교류라는 명분 아래 연주 기회를 얻지만, 국내 창작곡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개별 작품의 우열을 넘어 한국 음악계의 레퍼토리 정책과 창작곡에 대한 인식 전반을 향한다. 외국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하거나, 국내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작품을 음악 자체의 완성도와 독창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③ 브람스의 무게와 독주 바이올린의 불균형

 

주미 강의 브람스는 무거웠지만, 소리는 가늘고 얇으며 날카로웠다. 보잉과 릴리즈에서 음의 균질성이 떨어지고 프레이즈를 급하게 처리하는 습관도 여전했다. 특히 1악장에서 제2주제가 끝난 뒤 이어지는 경과구에서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졌다. 느리고 장중하게 설정한 템포 속에서 바이올린은 그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듯했다. 한층 느려진 아다지오에서는 시간의 양과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마찰을 떠올렸다. 북유럽과 발트 3국에서 느껴지는 시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기 위해 소비하는 자원이라기보다, 한 장소에 머물며 주변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대상에 가깝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통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장중함은 브람스뿐 아니라 2부 시벨리우스에게서도 관통하는 정서였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감각은 주미 강의 연주와 좀처럼 맞물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불안한 기류가 감돌았고, 2악장 코다에서는 두 차례나 합이 어긋나 조마조마한 순간을 연출했다. 이는 불과 5개월 전 김선욱과 함께한 리사이틀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당시와 비교하면 호흡과 진행, 음향의 성격까지 너무나 달랐다. 다만 두 연주에서 공통으로 발견한 지점이 하나 있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바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 주미 강의 강점이었다.

풍성한 음향과 중저음의 깊이, 긴 호흡으로 선율을 이끌어가는 힘보다는 음의 윤곽을 또렷하게 세우고 하나하나의 음을 깨끗하게 드러내는 능력이 그녀에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결과 바흐는 딱딱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감각적이고 부드러운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간결한 음향은 때로 기타의 발음을 연상시킬 만큼 선명했다. 바흐의 음악이라고 선뜻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낯선 인상이었지만, 바로 그 낯섦이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 앙코르가 앞으로 주미 강의 연주가 나아갈 방향을 조금이나마 예측하게 하는 단서일지 모른다. 장중한 레퍼토리의 무게를 짊어지기보다 음 하나하나의 선명함과 섬세한 감각을 살리는 것. 이번 연주에서 아쉬움이 컸던 만큼, 역설적으로 앙코르 바흐에서 발견한 가능성은 더욱 또렷하게 남았다.

 

④ 자연이 음악으로 성장하는 시간

 

상술한 시간의 경험은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 자연과 맞물려 스스로 움직이고 성장하며 장엄한 질서를 형성하는 작곡 원리로 작용한다. 마치 호수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수면에 윤슬이 번져가듯, 1악장은 점진적으로 분위기를 형성하고 2악장은 변주곡의 형식 속에서 음악적 소재를 발전시킨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3악장의 ‘백조의 비행’에 이르러 그 흐름은 거대한 에너지로 응축된다.

1악장에서 예르비는 서두르지 않고 음악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개별 악기군의 동기와 리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축적한 에너지는 후반부에서 폭발했다. 반면 2악장에서는 역동적인 흐름과 대조적으로 고요한 자연의 표면 아래 흐르는 생명의 맥박이 섬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현악기의 트레몰로에서는 악센트를 강조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부분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면서, 음악에 독자적인 추진력을 부여했다. 정적인 표면과 그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시벨리우스의 주요 작곡 기법 가운데 하나는 작은 구성 요소의 변화를 통해 내적 에너지를 축적하고, 이를 거대한 음악적 구조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예르비는 이러한 과정을 산만하게 흩뜨리지 않으면서 악기군 사이의 음색을 섬세하게 교류시켰다. 짧은 동기와 리듬적 요소가 점진적으로 변형되고 결합하면서 음악 전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 과정에서 주제와 반주, 선율과 리듬의 경계 역시 점차 흐려진다. 각각의 요소는 독립적인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고, 마침내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자연이 작은 생명 활동의 축적을 통해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듯, 시벨리우스의 음악도 개별 요소들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는 듯한 생명력을 획득한다.

3악장 ‘알레그로 몰토’에서 호른이 제시하는 이른바 ‘백조’의 이미지는 콘트라베이스의 콜레뇨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보잉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우아하게 활공하는 백조라기보다는 거대한 드론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한 인상이었다. 전통적인 백조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이 낯선 음향은 오히려 자연의 압도적인 규모와 움직임을 생생하게 환기했다. 북구의 자연에 대한 경외, 그리고 인간의 의미와 척도를 초월하는 생명력의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3악장 종결부의 여섯 차례 화음 총주와 그사이의 침묵도 인상적이었다. 침묵은 음악의 흐름을 단절하는 공백이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된 에너지를 응축하고 다음 화음을 더욱 강력하게 부각하는 요소로 기능했다. 소리와 침묵이 교대로 긴장을 조성하면서 음악의 흐름은 더욱 긴밀해졌고, 마지막 총주는 마침내 대단원의 도래를 선언했다.

브람스에서는 장중한 시간의 무게가 독주 바이올린의 음향과 충분히 조응하지 못했다면, 시벨리우스에서는 기다림과 점진적인 축적이 음악의 성장 원리와 맞물리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한쪽에서는 시간이 연주자에게 부과하는 부담이 드러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간이 음악 내부의 생명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펼쳐졌다. 두 작품의 대비는 단순히 연주 완성도의 차이를 넘어, 음악이 시간을 조직하고 경험하게 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주었다.

 

⑤ 엘레지,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시간

 

개인적으로 이날 공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순간은 관현악 앙코르로 연주한 스웨덴 작곡가 후고 알벤(Hugo Alfvén)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모음곡》 Op. 49 중 〈엘레지〉(Elegy)였다.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을 이끌었던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해 1932년 상연된 루드비그 노르드스트룀(Ludvig Nordström)의 연극에 삽입된 부수음악이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듯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선율에는 과장도, 슬픔을 강요하는 감상성도 없었다. 처음 듣는 작품이었지만 그 담담한 애도는 불과 한 달 전 아버지를 하늘나라에 보낸 필자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음악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그를 향한 그리움을 조용히 일깨웠다. 어떤 음악은 작곡가가 의도한 정서를 넘어, 듣는 이가 통과하고 있는 삶의 시간과 만나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얻는데 이날의 〈엘레지〉가 그랬다.

그 여운이 그대로 남았으면 좋았으련만, 뒤이어 연주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1번은 감정의 흐름을 단숨에 끊어놓았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노래한 시벨리우스에서 시작해, 지나간 시간과 상실을 조용히 되새기는 알벤의 〈엘레지〉까지 이어졌던 정서가 갑작스러운 흥겨움 앞에서 와장창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공연장의 다른 청중에게 이 앙코르는 전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은 브람스의 익숙한 선율에 맞춰 흥겨워했고, 파보 예르비 특유의 역동적인 지휘 동작까지 흉내 내며 즐거워했다. 누군가에게는 감정의 단절이었던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쾌한 축제의 마무리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어찌하랴. 음악회가 끝난 뒤에도 필자에게 남은 것은 브람스의 흥겨움보다 알벤의 담담한 선율, 그리고 그 선율 속에서 잠시 마주했던 아버지의 기억이었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